봄비 속을 걸으며

(2023년 05월 07일)

지난 주에는 참 곱게 봄비가 내렸습니다. 겨울이 지나간 지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겨우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들을 나무라지 않고 살짝 흔들어 깨우는 봄의 배려와 같은 포근한 비였습니다. 살짝 뿌리는 봄비를 맞으며 길을 걸으니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봄비 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이수복의 봄비라는 시의 첫 구절입니다. 이 시를 읽다 보면 고려 시대 시인인 정지상이 쓴 송인, 送人이라는 시 구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갠 긴 강둑에 풀빛 푸른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아름다운 봄날을 노래한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에서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라고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봄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하늘의 은혜입니다. 이 봄비가 그치고 나면 강둑만 푸르러 올 뿐 아니라 산천이 푸름으로 뒤덮이고 들녘의 풀들은 새롭게 자라날 것입니다. 봄비는 낮아진 사람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주는 자연의 격려와도 같습니다. 세차게 퍼붓는 여름날의 소낙비와 다르게 봄비는 고요히 다가와 마음에 속삭입니다. 꽃으로 라도 때리면 아플 여린 마음에 힘을 내라고 부드럽게 어깨를 두드리는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과 같습니다. 하늘을 열고 살포시 내리는 봄비를 보면서 행복한 노래를 불러야 할 텐데 고대 시인이나 현대 시인이나 왜 봄 비를 보면서 이렇게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아름다운 봄날을 아프게 표현한 것은 한국 시인 뿐 아닙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T.S. Eliot의 ‘황무지, The Waste Land’의 첫 구절도 마찬가집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가장 아름다운 봄날을 찬란한 슬픔으로 노래하는 사람에게는 제각기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봄비를 보면 그 옛날 초가지붕에 톡톡 떨어지는 빗줄기가 떠오릅니다. 여름의 장대비가 아니라 차분히 초가지붕을 타고 내리는 봄비는 대지를 어루만지는 봄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봄비를 보면 생명과 기쁨의 찬가보다 아픔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가장 아름다운 봄날 사월에 병원에 입원하셨고 찬란한 오월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오월은 보리밭이 푸를수록 아픔도 더하고 하늘의 새들 노래 소리 청아할수록 그리움은 깊어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시기도 사월로 알려진 것을 보면 저렇게 아름다운 사월 하늘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봄비를 맞으며 하늘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세상은 한없이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의 목사 류응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