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과의 악수
아들의 권유로 처음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나왔을 때였습니다. 저는 예전에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을 했었기에 인사 때 악수하는 습관이 있어서 예배 마친 후, 목사님 내외분과 인사할 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중에 고등학생인 아들이 “엄마, 우리 목사님은 여자들과 악수는 물론 눈도 안 마주치는 분이신데 어떻게 엄마가 악수하자고 했어요? 엄마, 절대 그러면 안돼요”라며 펄쩍 뛰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용감해서 악수를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발각된 비공식 심방
임창호 심방 전도사님이 2년 공석 기간이었을 때였습니다. 나가서 한 사람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기에 교회로 찾아온 분을 잃는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무작정 새가족 등록지에 나와 있는 연락 정보만 가지고 새가족부의 동역자였던 배정자 권사님에게 함께 비공식 심방을 하자고 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묵상을 나누며 심방하고 돌아왔을 때 이원상 목사님이 다녀가셨고 우리가 몰래 한 심방 소식을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시작했던 비공식 심방이라 큰일났다고 걱정하며 목사님께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라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오히려 우리를 위로하시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엄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자비롭고 인자하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생긴 난처함
1994년 서울 SEED 후원자의 밤에 참석한 후 일행들과 함께 돌아올 때 공항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출국하려고 비행기를 타러 들어갔는데, 저는 귀국 때 받은 서류 중 하나를 별 생각 없이 버리는 바람에 출국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해 애타게 발만 동동 굴러야 했습니다.
그때 바로 건너편에서 떠나지 않고 말없이 기다려 주신 분이 이원상 목사님이었습니다. 인자하고 자비로운 선한 목자의 모습 그대로 끝까지 기다려 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두들 탑승구로 떠난 후여서 저는 통과되더라도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목사님은 저를 두고 떠나지 못하시고 끝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성도들을 위해서 기다리며, 인내하며, 늘 기도해 주시는 분인 것을 그때 정말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