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신학교 졸업을 앞둔 저는 진로를 놓고 하나님만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워싱턴 근교에 위치한 두 교회에서 사역자로 청빙을 받게 됐습니다.
한 교회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담임목사 이원상)였고, 다른 한 교회는 메릴랜드에 위치한 제일침례교회(담임목사 이동원)였습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는 하프타임(청소년 사역) 사역이었고, 제일침례교회는 풀타임 사역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다시 한 번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첫 목회지로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 대한 마음을 주셨고, 저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에 한 번도 뵙지 못했던 이원상 목사님과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만남이 지금까지 30년간 이어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이원상 목사님은 50대 초반의 안정된 목회자셨고, 저는 20대 후반의 신학교를 갓 졸업한 신출내기 목사였습니다. 목사님과 저는 15년은 와싱톤중앙장로교회라는 사역의 현장에서 담임목사와 부교역자로 그리고 원로목사와 담임목사로 함께했으며, 또 다른 15년은 서로 다른 곳에서 멘토와 멘티의 관계로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 30년 세월 동안 이원상 목사님과의 교제와 동역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과분한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남가주 목양실 책상에 앉아서 이원상 목사님과의 30년 간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그분이 보여주셨던 목회와 삶을 함께 목회하는 동역자들 및 교회의 일꾼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이 목사님을 저의 영적인 거장이자 멘토로 생각했지만, 이 목사님은 저를 목회 최일선에서 함께 싸우는 영적 전우로,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동역자로 대해 주셨습니다. 아무런 경험 없이 시작하는 목회 초년병들에게, 지금도 목회 현장에서 갈등하고 씨름하는 동역자들에게 앞서 걸어간 한 목회자의 사역과 삶이 하늘에서부터 주어지는 지혜로, 때로는 진지한 책망이자 눈물 어린 위로로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말이 아닌 성품으로 말씀하시는 분
- 간섭하시지 않는 리더
- 차가우신 분? 편애하지 않으시는 분
- 보수적 신앙을 지키셨던 분
- 율범주의자?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목회자
- 청빈함과 검소함의 모델
- 목회자의 목회자
- 목사님의 삶을 통해서 깨달은 지혜
- 우리 부부의 멘토
- 관계를 지키는 지혜
- 지속적인 관계
- 리더쉽 전환의 좋은 모델
목사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목사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조용하고 온화하신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화려한 언변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이 아닌 성품으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겸손하면서도 분명하게 의견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소리 높여서 말씀하시거나 특별히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과묵하신 성품 탓에 목사님의 의중이나 생각을 잘 읽을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곁에서 목사님과 함께하다 보면 짤막한 표현 속에 긴 여운이 담겨 있음을 깨닫고 깊은 의미를 가진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목사님에게 의견을 묻거나 제안을 하면 목사님은 “기도해 보겠습니다” 혹은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답을 하시곤 합니다. 어떤 문제에 관해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면 그 문제의 대답은 ‘예스’일 가능성이 크고, 반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답을 주시면 ‘노’일 가능성이 큽니다. 목소리 톤의 변화는 없지만 평소처럼 침착하고 단호한 음성으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실 경우에는 이를 더 두고 볼 수 없다거나, 한편으로는 강도 높은 책망을 의미합니다. 이 목사님은 온화함을 잃어버린 적은 없지만 분명하게 소신을 밝히시거나 선을 긋기도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후임자로 제가 섬기고 있을 때, 교회 내 성도님들에게서 이런 저런 애기가 오가고 그 얘기가 목사님께도 들렸습니다. 한참 들으시더니 목사님께서 한 마디 하셨습니다. “노창수 목사님이 내 담임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목회를 잘한다, 못한다가 아닌 짧은 몇 마디로 신뢰를 보여주셨고, 부족한 후임자의 영적 권위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 면모를 곁에서 보면서 배우게 된 것은, 말에 대한 절제와 지혜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듣기는 속히 하셨고, 말씀하기는 더디 하시면서 화를 내신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후임자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보여주셨습니다
담임목사로서 이원상 목사님은
담임목사로서 이원상 목사님은 부교역자에게 사역을 맡기고 잘하기를 기대하시는 리더였습니다. 교역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일을 알아서 잘해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하시기 때문에 야단치시기보다는 오래 참으셨고, 조용히 말씀으로 타이르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교역자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길 기대하는 심정으로, 간섭보다는 기도로 후원하시는 사려 깊은 리더였습니다. 사역에 관한 깊은 토론을 하거나 나눔은 없었지만, 코람데오의 목회를 강조하셨습니다.
목사님 스스로 먼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섬기셨습니다. 그런 목사님의 중심과 신실한 삶을 읽는 교역자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내향적인 성품에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시는 목사님은 열심히 사역하지 않는 교역자를 보면 마음이 상당히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가르치거나 간섭하시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거나 가끔 교제하는 자리에서 교역자들에게 “충성하세요. 충성하시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라며 권면하시곤 했습니다.
차가우신 분 편애하지 않으시는 분
종종 목사님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 목사님은 대인관계에서 차가우시다”, “목사님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맞는 애기면서도 틀린 애기입니다. 실제 목사님은 특정 사람을 가까이 하신 적도, 그렇다고 멀리 하신 적도 없으십니다. 지척에 있는 교역자들과도 늘 적당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그런 부분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편애하시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시지 않는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 그 의중이 이해가 됩니다.
이 목사님은 특정한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면 시험에 들기 쉽고, 편애로 말미암아 관계에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길임을 아시고 이를 실천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목사님께서 철저하게 주일성수를
목사님께서 철저하게 주일성수를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교회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의 주일은 모든 상거래와 매매가 금지된 날입니다. 주일예배 전후 교제를 위해 나누는 도넛은 그 전날에 배달되어야 했습니다. 목사님 스스로도 주일에는 식당에 가셔서 식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주일성수를 문자 그대로 믿고,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랬기에 센터빌 지역으로 예배당을 새로 짓고 이사온 후에도 카페를 오픈하기까지 한동안 고민이 많았습니다.
예배 중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한 분만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의 내적 가치만이 아니라 외적 태도나 방식에까지 그 진실함이 드러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그 가치를 드러내려고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배에서는 기존의 요소가 강했고, 젊은 세대를 위해서 모던워십을 기획하고 무대 강단의 변화를 주거나 기타, 키보드, 드럼을 놓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주일예배 안내위원과 헌금위원은 언제나 단정한 차림을 해야 했습니다. 여성 봉사자 드레스코드는 치마 정장을 입되, 진한 색상을 맞춰 입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드레스 코드를 맞추지 못한 성도님이 자신이 섬길 수 있는지 물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성도 한 분 한 분이 바르고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랜 전 이야기지만 이웃교회 교역자 수련회가 좋았다는 소문을 듣고 우리 교회도 교역자 수련회를 가자고 건의를 드려서 수련회를 가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웃교회 수련회가 즐거웠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내심 그런 기대를 하고 갔습니다. 기대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과 기도로만 일관하셨습니다. 그 덕분에 말씀은 충만했지만 교역자들 안에 교제의 부족 등 아쉬움을 토로하면서 수련회를 제안했던 제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쉽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이 목사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항상 경건과 모범적인 신앙이 목회자 자신의 생활 가운데 깊이 뿌리 박혀 있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신중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한번은 어린 제 딸이
한번은 어린 제 딸이 뜬금없는 질문을 해서 한바탕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빠, 주일 성수는 누가 만든 거야? 원로 목사님과 우리 가족만 지키던데, 모두 다 지키도록 하면 안 될까?” 어린 제 딸 눈에는 주일성수가 율법주의적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은 이렇듯 이 목사님이 율법적인 분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 목사님은 절제와 인내를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적절히 담을 줄 아셨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싶어 하셨습니다.
모든 것과 담을 쌓고 사는 분이 아니라 구별된 삶을 위해서 몸부림쳤던 성도이자 목회자이셨습니다. 목사님 역시 좋아하는 풋볼 팀도 있었습니다. 댈러스 카우보이 팀의 팬이셨던 목사님은 가끔 TV 생중계로 그 경기를 즐겨 보시기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목사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청빈하고 검소한 목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목사님은 단 하루를 살아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고 싶어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말은 그런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청빈함과 검소함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으로 전수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회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목회 기간 내내 굽힌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목회 기간 중 교회에 부담을 주거나 짐을 지운 적이 없으셨습니다. 은퇴 후에도 제가 아는 한 그런 적이 없으셨습니다.
약사로 근무하셨던 사모님께서는 낮에는 목사님의 사역을 도우셨고, 밤에는 야간 근무를 하시며 생활을 꾸려 가셨습니다. 교회에 짐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아낌없이 헌금하셨고, 복음의 일선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SEED 선교회를 후원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 목사님은 물론 기도로 묵묵히 내조하셨던 사모님께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학교에 입학한 한 전도사님이 학교에 오면서 고급 캐딜락을 끌고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그 전도사님께 넌지시 “이젠 자동차를 바꾸셔야 합니다”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목자의 길을 걸으며 양 떼를 돌보기로 결단한 사역자라면 육신의 안락함을 기꺼이 내려놓고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매순간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힐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학교를 막 졸업하고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할 당시 제 수중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내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보험 없이는 출산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교역자들은 사모님들의 직장을 통해 의료보험을 지원받고 있었고, 그 당시 저희 교회에서는 보험 지원이 없던 터라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교회에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 목사님께 배운 대로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은 주지 말자’라고 결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아내가 취직하여 그 회사에서 출산 보험을 커버해 줬고, 목회 초년생인 저희 부부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돌보심을 경험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사실 부교역자 사례로 생활이 어려웠던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재정적인 위기 때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오랫동안 사택을 렌트해서 사시면서도, 교회 건축을 할 때는 생활비를 더 줄여서 헌금을 하셨습니다. 목회 기간은 물론 은퇴하신 후에도 평범하고 실용적인 승용차를 타셨고, 다른 주나 해외로 출장을 가실 때는 항상 일반석 항공권을 구매하셨습니다. 교회에 부담을 주기보다는 당신이 몸소 불편을 감수하셨습니다. 늘 청빈하고 검소한 모습,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저를 비롯한 많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자극이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한 댈러스신학교는
제가 공부한 댈러스신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목회자로 내면적인 부분을 준비하기에 너무나 좋은 선지동산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달리 목회 현장을 보면서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에 본이 되지 못하는 선배 목회자들을 보면서 갈등하던 때도 많았습니다. 갈등이 심해질 때는 어떻게 목회해야 할지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갈등과 고민 속에서 만난 분이 이원상 목사님이었습니다. 목사님과의 만남은 지금 돌이켜 봐도 제게는 너무나 커다란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이 목사님은 말로만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목회와 삶을 통해서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는 리더였습니다. 세간에 쏟아지는 수많은 리더십이 있지만 제게 와 닿는 것은 없었습니다. 꼭 홍수 속에서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갈증만 커져 가던 터에 이 목사님을 통해서 삶으로 가르치는 목회자를 보게 되었고 마음에 깊이 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배우기까지 장구한 세월과 인내와 수고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메시지였고 보물이었습니다.
이원상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주신
이원상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정직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다른 어떠한 것보다 하나님께 시간 드리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출퇴근 하셨고, 퇴근 후에는 성도님들 가정을 일일이 심방하셨고, 교회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매일 성도들과 동일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란 말씀 그대로 사셨고, 코람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만 온전히 목회하셨던 분입니다. 목사님만큼은 아니지만 이 목사님께 배운 대로 부교역자 시절부터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으로, 지금은 남가주사랑의교회 담임으로 섬기면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과만 경주하는 삶, 그분께 충성된 종으로 살기를 소원하고 오늘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목회는 한마디로 ‘기도’의 목회입니다. 1년, 12달, 365일 단 하루도 새벽기도를 쉬지 않으시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 앞에서 기도의 무릎으로 시작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은 많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 어떤 목회 매뉴얼보다 더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철저히 지키신 이 목사님 덕분에 새벽기도에 얽힌 에피소드가 유난히 많습니다. 비엔나 예배당 시절의 일입니다. 폭설로 도저히 운전할 수 없자 목사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연락을 드렸습니다. 제 생각에 이 목사님께서 “오늘은 눈이 많이 왔으니 댁에서 기도하시지요”라고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달리 이 목사님께서 저희 집으로 오셔서 저희 부부를 태워서 교회로 가셨습니다. 그 날 새벽기도는 이 목사님 내외분과 저희 부부, 전도사님 한 분, 모두 다섯 명만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목사님께 기도를 배웠습니다.
제가 담임이 되고 센터빌로 예배당을 옮기고 나서 어느 날인가 폭설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퇴근길에 내린 폭설로 다시 교회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정말 설상가상으로 교회까지 정전이 되어 교회 앞 성도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기도를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머물게 해준 그 집사님 댁 부부가 함께 새벽기도를 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정말 기도를 그렇게 배웠고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인가 목사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도 저렇게 기도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보면서 소원 하나가 생겼습니다. 새벽에 기도하러 앉았는데 다시 일어서 보니 한밤중이 됐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이원상 목사님은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준비된 순종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았어도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전도사 시절에 일이 정말 많아서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목사님께서 수요저녁예배 설교를 부탁하셨습니다. 갑자기 설교를 어떻게 하나 고민도 되고, 당장 밀린 일도 워낙 많아서 난감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왜 갑자기 설교를 못하신다고 하신 걸까 하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모든 걸 떨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강단을 지켰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일은 피하고 쉽고 작은 일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순종함 속에 자신이 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애쓰셨고, 언제나 예수님을 닮고 싶어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는 신앙관을 갖고 사셨습니다. 성도와 함께 일하고, 함께 호흡하며 자신의 특권을 기쁘게 내려놓으신 분이 바로 목사님이십니다.
목사님께선 비엔나 예배당 시절, 예배당에서 식사할 때면 늘 성도들과 함께 줄을 서서 드셨습니다. 조용히 줄을 서서 음식을 받고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셨습니다. 누가 시간이 없으신 목사님을 위해 음식을 따로 준비해 드릴 수도 있었지만, 이 목사님은 성도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아서 같이 드셨습니다. 저는 그런 목사님이 좋았고, 아마 성도님들도 그런 모습의 목사님을 더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목사님은 휴가 중에도 주일 강단은 지키셨습니다. 목사님은 “목회가 쉼이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신의 시간을 주님께 바치고 성도를 위해 본인의 불편함을 감수하셨습니다. 또한 성도를 위해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는 일을 조금도 부담스럽거나 희생적인 일이라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목회가 쉼이라고 여기시는 목사님의 뒤를 이어 교회를 섬겼던 제게는 여러 가지로 쉽지가 않았습니다. 담임목사로서 목회의 현장에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 목사님의 강인한 체력에 감탄했고, 속으로는 ‘나는 한국전쟁 세대인 목사님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제게 체력과 영력을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는 그때 배우게 됐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10년간 담임으로 섬겼던 와싱톤중앙장로교회를 사임하고 남가주사랑의교회를 택할 용기가 생겼던 것은 이 목사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의 영향이 컸습니다. 중앙장로교회에서 안정된 목회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목사님께 배운 대로 겸손하고 또 겸손한 목회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오늘날 참된 목자로 섬기
오늘날 참된 목자로 섬기는 진정한 목회자를 찾는 일이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거슬러서 평생 주님 한 분 사랑하셨고, 그분의 몸 된 교회를 동일하게 사랑하셨던 목회자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부족한 저희 부부를 진심으로 아껴 주셨고, 특히 저희 딸 한나는 어려서부터 이 목사님 내외분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이 목사님과 사모님은 저희 부부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신 멘토이셨습니다.
이원상 목사님은 부족한 저를
이원상 목사님은 부족한 저를 목회자로 키워 주셨고, 언제나 신뢰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은퇴하시기 전, 목사님을 찾아가서 한 가지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만일 성도들이 찾아와 후임 목사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거나, 제게 찾아와 원로목사님에 관해 말하는 일이 생길 때 당사자인 우리가 서로 확인하기 전까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요동하지 않길 부탁드렸던 이유는, 이민교회 안에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이고, 원로목사와 후임 목사와의 관계는 좋은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저의 제안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지혜롭게 잘 지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목사님과 지속적으로
이처럼 목사님과 지속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큰 은혜 때문입니다. 저를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으로 청빙한다고 결정했을 때 목사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면서, 만일 목사님과 관계가 깨질 것이라면 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담임 목회하는 것도 귀하지만, 목사님과의 관계가 깨지면서까지 목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셔서 감사하게도 오래도록 목사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를 떠나게 될 때 목사님 내외분께서는 저에게 그동안 수고 많이 했고, 하늘의 상이 클 것이라며 격려와 축복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원로목사와 후임 목사가 함께 교회 리더십 전환(Leadership Transition)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현재 이민교회나 한국교회는 안타깝게도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와의 사이에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와싱톤중앙장로교회가 좋은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책을 쓰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글로는 남길 수 없지만, 목사님과의 좋은 관계는 오래도록 남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목회하신 목사님과 사모님을 마음에 담고 싶습니다. 한번은 사모님께서 예배 시간에 찬양을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찬송가(27장)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같이 빛나네. 해 같이 빛나네.
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없는 자비를
뭇 천사 소리 합하여 늘 찬송 드리네. 늘 찬송 드리네.
영 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떠나서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날 위해 지셨네.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로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큰 기쁨 넘치네.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 이르러 그 영광 몸소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내 기쁨 넘치리.
선한 싸움을 싸우신 목사님,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가신 목사님,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목사님!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사님 내외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삶으로 목회자의 자세와 생활 그리고 목회를 가르쳐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내외분은 하나님께서 제 인생에 허락하신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