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05일)
“울음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픔에 대한 글 가운데 첫 기억으로 남아있는 안톤 시냐크의 문장입니다. 원하는 장남감을 얻지 못해 떼를 쓰는 아이든, 보육원에서 방문한 사람들이 떠난 후에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아이든,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슬픔 가운데 제 가슴에 가장 깊이 새겨진 글은 미국 여류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절입니다. “고통스러운 표정이 나는 좋다. 그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평생 세상과 이별해서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가 시를 썼던 여인이 남긴 한 구절이 가슴에 스며 들어왔습니다. 그냥 새겨졌다고 할 것이 아니라 시가 걸어서 제 속으로 들어와 저의 몸에 자리를 펼치고 영영 떠나가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슬픔이라는 흔적이 곳곳에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의 삶에 그만큼 슬픔이 많다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그만큼 깊이 아신다는 말입니다.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하게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 수만가지 생각이 대양의 파도처럼 요동쳤지만 여정 중간에 종들을 두고, 이삭만 데리고 죽음의 산으로 오르는 아버지. 성경 전체 스토리 가운데 제 가슴을 가장 슬프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하나님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픈 슬픔을 경험한 분이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원수 된 사람들을 위해 죽음의 십자가에 매달게 하신 분이니까요.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들의 마지막 절규에 고개를 돌려야 했던 아버지, 호흡이 끊어지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아픔은 예수님의 손과 발에 박힌 대못처럼 한 순간도 떠나지 않는 고통입니다. 아버지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슬픔의 깊이를 말하자면 대양을 먹물로 삼아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떠나 먼지 나는 세상에 오신 예수,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창조주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세상에서 조롱과 저주를 당하면서도 사랑하고 품고 섬기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하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예수님. 대체 예수님은 왜 그렇게 해야만 하셨습니까? 우리는 슬픔에 에워싸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은 있기 마련입니다. 목사라고 예외이겠습니까? 그런데 목사로서 늘 다짐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그 십자가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게 하소서. 당장이라도 뛰어내려올 수 있는 그 죽음의 나무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리면서 “너를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늘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러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흐르는 눈물, 부서지는 심장을 감싸주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제가 쓴 <사람마다 향기다> 시집에서 이 마음을 담은 한 구절입니다. “내 정녕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가/ 누군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면/ 떨리는 손을 잠시라도 잡아 줄 수 있다면/ 내 위대한 인생이라고 웃음 지을 수 있을 텐데.”
여러분의 목사 류응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