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2025년 10월 26일)

그리스인의 사고와 유대인의 사고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란 거대한 두 사고체계를 인류 역사에 펼쳐 놓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신들과 세상의 진리를 사상이라는 그물로 잡을 수 있는 체계로 보았고, 그 얽혀진 진리의 숲은 이성이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신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의 실제적인 이야기로 보았고, 그 이야기는 관념의 바다에 떠도는 체계적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체험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두 사상의 흐름 가운데 전자는 인간 중심, 후자는 신 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해 왔습니다. 양자의 거대한 산맥 가운데 서양철학은 오랜 세월 이성의 파워가 지배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성이라는 사유의 탑을 하늘까지 쌓는다 해도 노아의 시대처럼 하늘에서 퍼붓는 홍수를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성주의는 ‘삶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해답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채 유리병에 갇힌 파리처럼 날개짓하다가 문제라는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추락할 뿐입니다. 이성은 아무리 찬란한 옷을 입고 불을 밝혀도 실재라는 진리의 그림자도 비추지 못합니다.

진정한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세상 안에 갇힌 체계를 뛰어넘는 다른 세계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계시라고 말하며, 그 계시의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 자신이요, 모든 계시를 풀어주고 완성시킬 성취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계시를 만난 사람은 예수라는 인격체를 만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이 덧없고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긍휼을 구하고 겸손의 세계를 간구합니다. 현대사회는 정보의 과잉 시대입니다. 하루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횟수가 평균 2,300번이라는 통계는 인간됨이라는 고귀함을 기계문명에 넘겨버리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이제 조금 차분하게 걸음을 멈추고 하늘의 별을 헤어 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멈춤이라는 것은 경쟁이란 이름의 세계에 저항의 깃발을 꽂고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인생 여정의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가? 마침내 이르고 싶은 그곳에서 무엇을 만나고 싶은가? 그곳에 내가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확신이 있는가? 죽음 앞에 설 때 그제서야 “사는 것이 뭐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이보다 더 서글픈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이런 질문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방향없이 떠도는 바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라는 좌표가 정확하게 정해진 순례자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의 형상을 담은 고귀한 존재로 창조된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숭고한 터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찬란한 가을날, 토요새벽예배 시간을 통해 기독교 고전의 숲으로 여러분을 안내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목사 류응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