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3일)
일본의 기독교 작가 기타모리 가조가 쓴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제목을 읽는 순간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아픔이라는 말은 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처럼 아픔이나 슬픔을 느끼지는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이라고 말할 때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아픔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관계는 끝없는 사랑으로 연결된 관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모진 고난의 삶을 겪게 하시고, 마침내 그 아들을 희생하면서 우리를 살려내신 그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만드는 학문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이해 가능한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아는 사람,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목자의 애타는 심정을 아는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픔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게 되고 인류를 위해 아들을 바치는 하나님의 거룩한 희생, 나를 향해 외아들을 십자가에 올려보내는 아버지의 심장을 만지게 됩니다. 십자가는 사랑할 수 없는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픔이며, 죽음으로 결정된 인생에게 주어진 부활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골고다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싸우셨다”고 표현합니다.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야만 하는 하나님이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아들에게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과 싸우셔야만 했습니다. 부서진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부서지셨습니다. 평안과 자유를 상실한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평안을 박탈당하고 자유를 포기해야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삶의 모든 희망을 상실해도 여전히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절망의 늪에서 소망을 잃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소망을 찾았노라고 소리치게 만듭니다. 상처 입은 영혼은 그 자리에서 피어나는 회복의 꽃향기를 맡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든 상처를 친히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만나는 사람은 아픔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아픔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선물 때문에 아픔 속에서 하늘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12). 주님, 부디 우리 심장에 주님의 아픔을 심어주소서.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픔의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그래야 연약한 인생은 순간이라도 주님을 향해 걸음을 멈추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겠나이다.
여러분의 목사 류응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