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일)
로키산맥에서 하늘을 향해 직선으로 힘 있게 뻗어 있는 나무는 참으로 멋이 있습니다. 숲도 울창하게 만들어주고 재목으로 쓰일 곳도 많습니다. 산등성 비탈진 곳이나 바람이 세찬 정상에 오를 때면 구부정하게 자라나는 소나무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비탈진 곳에서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온몸을 납작 엎드리거나 긴 세월 모진 풍랑을 이겨내느라 하늘을 향해 치솟지 못하고 한 뼘씩 자라난 것처럼 고통의 흔적을 지닌 나무들이 있습니다. 이런 나무들을 보면 사람의 인생 나이테가 그 안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아 반갑고 정이 갑니다. 또, 어느 마디 하나 시원하게 뻗지 못한 모습을 바라볼 때면 아픔을 겪어낸 나무의 인내가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고통은 인생을 가르쳐 주는 좋은 스승입니다. 자신의 삶에 절벽 같은 순간을 겪어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어줄 수도 있고, 고통에 대하여 들려줄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 여유있는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무난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아픔으로 점철된 나이테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사람들에게 할 말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에게 고통은 걸어온 삶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고통의 빗줄기를 맞으며 자라납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고통은 자신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 고통의 눈물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듭니다. 내가 소중히 누리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누군가의 눈물과 땀이 맺어준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물에 반사적으로 마음이 끌립니다. 눈물의 의미를 알고 눈물 흘리는 사람의 가슴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넓은 가슴으로 넉넉히 어떤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고 아픔의 길을 걸으면서도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의지할 만한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처절한 절망을 경험하면서도 자신에게 소망을 속삭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하루에 밀물이 두 번은 있으니 일어나 봐.” 그래서 저는 눈물이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고통이라는 글자를 깊이 들여다 보면 마침내 떠오르는 한 분이 있습니다. 하늘을 버리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주님이지만 우리를 에워싸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몸에 지니신 주님. 그 고통의 몸을 이끌고 묵묵하게 골고다를 오르는 주님, 우리는 주님의 그 고통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절정을 만나게 됩니다. 긴 밤을 눈물로 지새우는 분이 있다면 우리의 눈물을 잘 아시는 그분께 나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자신의 심장에 담아 묵묵히 피를 쏟는 그분을 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는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과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끝납니다. 이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은 그 아픔을 가슴에 채우고 세상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목사 류응렬 드림